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종, 군밤의 왕/등장인물 (문단 편집) ===== 만민공산당 ===== * '''[[오경석]]''' 역관 출신의 개화파 중인. 상당한 애처가이자 공처가다. 천덕만의 군밤을 계기로 원 역사보다 이르게 고종과 연을 터서, 용상에 오르기 전 글공부 스승 노릇을 했다. 아이 글공부 가르치는 요령은 명성 자자한 [[맹꽁이 서당|맹공서당(孟孔書堂)]]에서 배워온 모양. 원래는 박규수 밑에 있었으나 명문거족 출신인 박규수와 중인 출신인 자신의 입장과 위치가 달라 조금씩 사이가 벌어졌고 결국 흥선대원군파로 갈라섰다. 그러다가 1874년에 치러진 한성 참의대부 재보궐선거에 박규수와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다. 마타도어까지 해가며 옛 동지인 박규수를 공격했지만 결국 낙선하고 만민공산당의 녹사(서기)를 맡는다. 그래도 박규수 말년에는 옛정 생각에 섭섭한 마음 접어둔 채 알던 역관들에게 수소문해 유작 짓는 데 필요한 서양서적들을 모아다 건넸다 하니 어느 정도 화해는 한 셈이다. [br]원 역사에서 아내를 앗아간 [[콜레라]]에 걸려 1879년에 사망하지만, 본작에서는 서양 의술의 도입이 상당히 조기에 이루어져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는 일 없이 1888년 총리대신으로 당선된 [[최익현]]의 지명을 받아 형조판서에 오른다. 그리고 영수에서 물러난 최한기의 뒤를 이어 만민공산당의 영수가 됐다. 1898년 기준으로는 영수직을 [[전봉준]]에게 넘기고 은퇴한 상태. * '''[[https://ko.wikipedia.org/wiki/최한기|최한기]]''' 원 역사에서 [[지구전요]]를 남긴 실학자. 즉위한 귀남의 소개를 받아 천덕만의 스승 비슷한 것이 되었으며 이후 무관이 된 천덕만을 자신의 딸과 이어주면서 장인어른이 되었다. 원 역사에서는 죽을 때까지 어떤 벼슬도 하지 않고 학문에 매진하였지만 본작에서는 벨레의 행보에 자극을 받아 한양 남부 참의대부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였고 당선됐다. 그리고 동문수학하던 대원군의 부탁으로 만민공산당의 영수를 맡게 됐다. * '''[[오세창]]''' 원 역사 [[민족대표 33인]]의 일원. 오경석의 아들이다. 공산당의 정론지 '익정신보'의 기자로 일하고 있다. 원 역사대로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대원군이 친 석파란을 모아 관리하는 일도 맡아 보는 중이다. * '''[[전봉준(고종, 군밤의 왕)|전봉준]]''' 문서 참조. * '''[[https://en.wikipedia.org/wiki/Eleanor_Marx|엘러노어 마르크스]]''' (=엘러노어 전) 칼 마르크스의 막내딸. 유학 온 전봉준과 눈이 맞아 결혼했다. 봉준에게 배워 조선말을 능숙하게 구사한다.[* 특히 [[한국어]] 욕에 대해서는 한국어에 능숙해지기 전에도 마스터해 버렸다. 전봉준 왈, 조선에 가더라도 남이랑 싸울 때 그 사람의 모든 조상들을 끌어들여 욕할 수 있는 경지라고.] 아버지 사후 남편을 따라 조선에 정착했다. 조선에 입국한 바로 그날 자신에게 수작을 부리는 [[조병갑]]을 원펀치로 KO시켰다.[* 이때 나오는 구절은 '''"여권(女權) 말하기에 앞서 여권(女拳, 여인 주먹)이 먼저 나서게 된 셈이었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남편 봉준이 추구하는 '제도 내에서의 개혁' 노선을 돕는다. 봉준과 결혼할 당시에도 이미 적지않은 나이였고 그 후로도 여러 정치 활동으로 바빴기에 봉준과의 사이에서 자식은 없다. 이후 행보를 보면 1900년대에 들어서까지도 유일한 외국인 참의대부가 프랑스인이었던 샤를 벨레라는 사실에 독일계 영국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해 참의대부 자리를 노려 1908년에 최초의 일명 '참의부인'이 됐다. * '''[[이상재]]''' 원 역사 [[조선일보]] 제4대 사장. 박정양의 문객으로 있다가 개화당 돌아가는 모양새에 실망하여 낙향하고서는 자신의 고향 서천군의 참의대부로 뽑혀[* 이상재의 고향은 정확히는 한산군으로 원 역사에서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서천군이 되었다. 본작에서도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다고 언급되었기에 한산군이 서천군에 합쳐진 것일 수도 있고, 혹은 합쳐지지 않았더라도 평소 인연이 있던 고향 이웃동네에서 출마했다거나, 아니면 한산군이 인구가 적어 서천군 선거구에 합쳐졌을 가능성도 있다.] 역대 최연소 참의대부로 이름을 날린다. 이후 계속 참의대부에 선출되어 1902년에는 국회의장격인 참의원정이 됐다. * '''[[민태호(조선)|민태호]]''' 원 역사 [[순명효황후]]의 아버지. 민승호와 달리 공산당에 붙는 쪽을 선택하였다. 영국 공사 등 평범하게 문신 커리어를 이어가다 제1회 영의정 겸 총리대신 추거에 만민공산당 후보로 나섰으나 낙선했다.[* 낙선했다지만 애시당초 목표가 개화당 후보 김병시의 낙선이었기에 목표는 이룬 셈이다.] 최익현 내각 출범 이후 원내 1당 배려 차원에서 좌의정으로 발탁되었다. 원 역사에서는 세자 척의 장인이지만 조선이 반쯤 입헌군주국으로 전환된 본작에서는 외척이 돼도 딱히 좋을 게 없겠다 싶어 나서지 않았다. 선택이 옳았는지 제2회 영의정 겸 총리대신 추거에서 개화당 영수 박정양을 누르고 4대 영의정 겸 총리대신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조선에 공황이 터지자 이에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질 테니 걱정말고 해결하라며 총리 자리를 내놓는다. 자신은 어차피 팔자에도 없는 총리 자리까지 한 번 올랐으니 만족한다고 한다. 여담으로 전봉준 이전까지 민선 조선 총리대신들 중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와의 별다른 인연이 없다.[* 역대 총리대신들을 살펴보면 최익현은 그 파리 코뮌 사건에 개입해 분쟁이 원 역사보다 커지는 것을 막아내며 프랑스에서도 무슈 최라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고 김옥균은 프랑스 그랑제콜에서 유학 생활을 했으며 김홍집 역시 주프랑스 조선공사로 근무하며 드레퓌스 사건에 개입한 경력이 있다. 그러다 영국 유학파 출신인 전봉준이 총리가 되면서 프랑스와 연이 없는 유일한 총리라는 칭호도 내려놓게 되었다.] * '''[[이동녕]]''' 원 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주석. 만민공산당의 청년조직 '청년고공회'의 리더다. 봉준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30대 초반에 참의대부가 됐다. * '''[[안규홍]]''' 원 역사 의병장. 조실부모하여 고향 보성에서 갖은 고생하다가 김제까지 흘러들어와 소작농이 됐다. 행동력이 있고 상대가 누구든 능히 자기 뜻을 조리있게 전할 수 있어 땅주인 홍 생원을 비롯해 일대의 여러 자작, 소작하는 사람들이 믿고 따른다. * '''김기범(=[[김개남]])''' 원 역사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봉준이 소싯적 함께 어울리던 고우(故友)이다. 사람됨이 토호로 만족할 만큼 얌전하지 못하여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공산당에 합류하여 삼남 일대를 붉게 물들이는(?) 큰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작중에서도 자칭하길 '개남장군'이라 하였다. [[자본론]]은 읽지 않았어도 [[무경칠서]]와 각종 총기 제원을 달달 외울 정도로 군무에 관심이 많고 비대해진 조선군에 비판적인 입장이라 봉준이 병조판서로 발탁했다. 개화당에서 관직 경험 없는 사람을 기용한다며 거세게 반발했지만, 귀남의 제안으로 열린 조선 최초의 인사청문회에서 6년[* 부사관으로 복무하다 장교가 부족하여 부사관 중에서 선발할 때 뽑혀 계급이 참위에까지 이르렀다.]에 달하는 군복무 경험을 바탕으로 미필 참의대부들을 가뿐히 제압하였다. * '''[[손병희]]''' 원 역사 천도교 제3대 교주. 봉준 개인과는 별 연이 없지만, 충청도 일대 공산당의 강력한 추천으로 전봉준 내각의 외무참판이 되었다. * '''민종식''' 원 역사 의병장. 만민공산당에 협력하는 여흥 민씨 중 한 명이다. 봉준이 예조판서로 발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